"공부는 안 하는데 성적은 왜 더 좋을까?" 고등학교 시절, 저는 친구 하나 때문에 이 질문에 매달렸습니다. 그 친구는 수업 시간에 자주 졸았고, 독서실에서도 저보다 일찍 집에 갔습니다.
그런데 시험만 보면 항상 전교 10등 안에 들더군요. 특히 수능처럼 응용력과 사고력이 필요한 시험에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친구의 아버지는 바둑학원 원장이셨고, 친구는 아마추어 대회에서 1등을 할 정도로 바둑 실력이 뛰어났습니다. 당시에는 바둑과 학습 능력의 연관성을 몰랐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바둑이 그 친구의 학습 능력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는 확신이 듭니다.
바둑·체스·장기가 집중력을 키우는 이유

바둑, 체스, 장기 같은 전략 보드게임은 한 판에 적게는 30분, 길게는 몇 시간씩 걸립니다. 이 시간 동안 아이들은 상대의 한 수 한 수에 집중하고 자신의 다음 수를 고민합니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지속적 주의력'**이 발달합니다.
저는 현재 초등학교 1학년, 3학년 자녀를 키우고 있는데, 일주일에 3번씩 한두 시간 정도 바둑놀이를 함께 합니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5분도 집중하지 못해 바둑은 그만두고 알까기로 마무리했습니다. 그런데 몇 주가 지나자 자연스럽게 20분, 30분씩 판에 몰입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스마트폰이나 유튜브 영상에 익숙한 요즘 아이들에게 이런 '깊은 집중' 경험은 너무 귀하죠.
제가 고등학교 때 봤던 그 친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친구는 공부하는 시간은 짧았지만, 공부할 때만큼은 누구보다 집중력이 뛰어났습니다. 문제를 풀 때도 한 문제에 깊이 파고드는 경향이 있었고요. 이런 집중 패턴이 바둑에서 나온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한국바둑협회에 따르면, 바둑을 배우는 아이들의 평균 집중 시간이 일반 아이들보다 약 40% 더 길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단순히 앉아 있는 시간이 아니라 실제로 사고하며 집중하는 시간이 늘어난다는 점에서 학습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사고력과 문제 해결 능력이 향상되는 원리
바둑의 묘미는 '수 읽기'에 있습니다. 바둑판에 돌 하나를 놓기 전, 머릿속으로 수십 가지 미래를 그려보는 과정이죠. 인지심리학에서는 이를 '작업 기억'이라 부르는데, 쉽게 말해 머릿속에 임시 설계도를 그리는 능력입니다. 복잡한 수학 문제를 풀 때 길을 잃지 않거나, 비문학 지문을 읽을 때 앞 내용을 까먹지 않는 힘이 바로 여기서 나옵니다.
제 직장 상사 한 분은 바둑 고수이신데, 이분의 보고서 검토 방식을 보면 혀를 내두를 때가 많습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단순히 '안 된다'가 아니라, "A안으로 가면 3단계 뒤에 이런 리스크가 있고, B안으로 가면 비용은 들지만 확실하다"며 마치 바둑판을 보듯 업무를 조망하시거든요. 이런 분들을 뵐 때마다 바둑은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생각의 근육'을 키우는 헬스장이라는 확신이 듭니다.
체스와 장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각 말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상대의 전략을 읽어내는 과정에서 패턴 인식 능력이 발달합니다. 이는 과학이나 수학에서 문제의 유형을 빠르게 파악하는 데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교육부 산하 한국교육개발원의 연구에서도 전략 보드게임이 수리적 사고력과 공간 지각 능력 향상에 유의미한 효과가 있다고 밝혔습니다. 특히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중학생 시기에 이런 게임을 접한 학생들의 수학 성적이 15% 높다는 연구 결과를 보니, 기물들의 가치를 계산하며 장기를 두던 제 동료의 빠른 암산 능력이 우연이 아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체스와 장기는 바둑보다 규칙이 단순해서 저학년 아이들이 접근하기 쉽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 부모님, 친구들과 장기를 두며 놀았던 기억이 납니다. 직장에 들어와서는 동료들과 장기를 두면서 승부욕이 생겨 유튜브나 책으로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경험이 쌓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전략적으로 생각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주요 보드게임별 학습 효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바둑: 공간 지각 능력과 장기적 전략 사고 발달. 무에서 유를 만드는 창의력 강화
- 체스: 논리적 분석력과 단계적 문제 해결 능력 향상. 기물 가치 계산을 통한 수리력 증진
- 장기: 빠른 상황 판단력과 임기응변 능력 발달. 위기관리 및 손익 계산 능력 강화
학습 태도와 감정 조절 능력까지 길러진다
바둑이나 체스, 장기를 두다 보면 필연적으로 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특히 아이들은 지는 것을 싫어하지만, 보드게임을 통해 패배를 받아들이고 다시 도전하는 법을 배웁니다.
처음엔 바둑판을 엎으며 울던 둘째가, 어느 날부터인가 "아빠, 나 여기서 실수했네. 한 판 더 해!"라고 씩씩하게 말하더군요. 이게 바로 전문가들이 말하는 '회복 탄력성'이구나 싶어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책으로 배운 백 마디 이론보다 바둑판 위에서 배운 한 번의 패배가 아이를 더 단단하게 만든 셈이죠.
제 고등학교 친구는 시험에서 실수를 해도 크게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바둑에서 한 수 실수했을 때처럼 그 상황을 분석하고 다음에는 더 잘하겠다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이런 멘탈 관리 능력이 결국 수능 같은 큰 시험에서 빛을 발했습니다. 실제로 그 친구는 수의예과에 수석으로 입학했고, 지금은 수의사로 일하며 풍요롭게 살고 있습니다.
바둑, 체스, 장기는 또한 예절 교육의 수단이기도 합니다. 대국 전후로 인사를 하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태도를 배웁니다. 이는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상대를 '나를 성장시켜 주는 파트너'로 인식하게 만듭니다. 이런 태도는 학교에서의 협력 학습이나 토론 수업에서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저는 어렸을 때 집에 바둑판과 바둑알이 있었지만, 규칙을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아 오목이나 알까기만 했습니다. 집짓기 게임이라는 개념 자체가 생소했고,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제 아이들에게는 그런 기회를 놓치지 않게 하려고 합니다. 바둑 규칙을 프린트해서 참고하면서 기초부터 함께 배우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겐 비밀인데, 저도 아이들에게 가르쳐주려고 유튜브로 '바둑 입문' 영상을 몰래 봅니다. 아빠 체면에 규칙도 모르면 안 되니까요. 가끔은 초등학교 3학년 첫째의 날카로운 수에 당황해서 땀을 삐질 흘리기도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저 또한 뇌가 젊어지는 기분을 느낍니다.
바둑은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더 주목받았습니다. 전 세계에서 대회가 열리는 것을 보면 이 게임들이 우리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증명된 셈입니다. 현재 스마트폰과 미디어에 과도하게 노출된 아이들에게 바둑 같은 전략 게임은 깊이 생각하는 힘을 되찾게 해 줍니다. 단순 암기 위주의 학습이 아니라 응용하고 분석하는 능력을 키우려면 이런 보드게임이 훌륭한 출발점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로서 제 바람은 단순합니다. 자녀들이 저처럼 많은 시간을 공부에 쏟아붓지 않아도, 효율적으로 학습할 수 있는 기초 능력을 갖추길 원합니다. 바둑, 체스, 장기가 그 밑거름이 되어준다면 이보다 좋은 투자는 없을 것입니다. 제 친구가 그랬던 것처럼, 제 아이들도 나중에 "공부는 많이 안 했는데 성적은 잘 나왔어"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